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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마실 이경수 대표와 ‘엄마 배우’ 손혜정 씨 가족. | |
부산에서 자라 광안중과 남일고를 졸업한 이경수(36) 씨. 학창시절 수학이나 과학만큼은 ‘더 가르칠 게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그가 KAIST에 입학한 건 당연했다. 적성에도 딱 맞았고, 성적도 여유 있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8년 설립된 한국정보통신대학원(현 KAIST-ICC)에 1기로 진학해 2005년 박사과정까지 끝냈다. 정통 코스를 밟은 공학박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씨는 생경하게도 현재 극단 대표로 일한다. ‘숫자’와 ‘공식’만 공부하던 그가 예술이라니. 물론 ‘본업’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은 동갑내기 아내 손혜정 씨다. 그는 손 씨를 대학 때 만나 2003년 결혼했다. 손 씨는 평범한 초등학교 교사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만약 아내가 별안간 ‘신이 내린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남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씨가 그런 상황을 맞았다. 어릴 적부터 연극하는 일이 꿈이었던 손 씨가 갑자기 휴직을 결정한 거다. 이 씨는 “아이들과 연극으로 대화하고 싶다”는 아내의 뜻을 따랐다. 덕분에 아내는 2003년 8월 ‘연수 휴직계’를 내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과정에 들어가 아동청소년극을 전공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첫 아이가 태어나 힘든 상황인데도 아내는 무려 30차례나 사전제작 공연을 거치면서 아이들의 반응을 연구해 가족극을 제작했다. 하지만 아내는 공연을 올릴 수 있는 제작자나 극단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이 씨는 아내의 공연을 자신이 직접 올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씨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극단 대표가 된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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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극 ‘달려라 달려 달달달’ 공연 장면. | |
말이 좋아 대표지, 사실 그의 역할은 ‘돌쇠’다. 평소엔 보도자료 만들고, 세무 관련 서류를 정리한다. 때로는 ‘전공을 살려’ 기계 수리도 한다. 공연 때는 기획 조명 영상 등 허드렛일을 도맡는다. 이렇게 2005년 말 극단 마실과 가족극 ‘달려라 달려 달달달’이 탄생했고, 아내 손 씨는 ‘엄마 배우’라 불리며 유명한 어린이들의 친구가 됐다. 손 씨는 지난해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가 주는 연기상도 받았다. “아내가 아예 사직서를 낸다고 해도 동의하겠느냐”고 묻자 극단의 돌쇠가 된 KAIST 공학박사는 “기사에 나갈 거면 ‘그렇다’고 써주이소”라며 웃었다.
극단 마실이 ‘달려라 달려 달달달’을 들고 이 씨의 고향 가까이 내려온다. 마실은 26일 오후 4시 경남 함안군 대산초등학교에서 ‘이야기 익는 마을잔치-달려라 달려 달달달'(작·연출 손혜정)을 상연한다.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계절 문화나눔 사업’의 한 가지로, 경북 충북 전남 등지를 옮겨가며 올해 말까지 순회 공연한다.
작품은 수도권에서 이미 우수 아동극으로 검증받았으며, 객석의 아이들이 반응하는 다양한 상황들을 공연에 적극 반영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된다. 보여주는 공연이 아니라 들려주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한 편의 노래처럼 들려지는 공연은 시각장애우들이 보기에도 좋다.
연극은 전라도 무주에서 전해내려온 무주 구천동 순행전설을 뼈대로 한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암행길에 어려움에 처한 한 가족을 발견하고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이다. 무료 공연이며,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은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이 씨는 “고향 부산에서도 꼭 공연을 선보이고 싶다”며 “여건이 되면 언제든 부산 무대를 찾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