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메모리 설계 26년차 엔지니어, 한국의 외침에 가슴이 아프다

저는 지금 삼성전자 시스템LSI(SLSI) 부문 산하 미국 연구소에서 여전히 비메모리 반도체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비메모리 설계에 뛰어든 지 26년, 에이디칩스는 저의 첫 직장이자, 이 길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은 흔히 비메모리 반도체 불모지였다고 말하지만, 이미 26년 전에도 그 길을 걷던 기업과 엔지니어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반도체는 메모리 강국이었지만, 우리는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택했습니다. 독자적인 CPU 코어 EISC’를 만들며, 설계 기술력만으로 세계와 겨루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에게 지적재산권(IP)은 곧 제품이었고, 이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대한민국 시스템 반도체의 미래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2002년, 우리의 꿈은 국가의 손에 꺾였습니다.
회사는 미국 법인에 ‘EISC 기술의 실시권’을 부여하는 계약을 맺었고, 이 대가로 거액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은 “유형의 선적(물건)도 없이 매출을 올리는 희대의 사기”라며 저희를 검찰에 고발했고, 긴 검찰 조사가 이어졌습니다. 기술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던 당시의 판단은 한 기업의 혁신을 멈춰 세웠습니다.4년간의 기나긴 법정 공방 끝에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이미 회사의 신뢰와 성장은 무너진 뒤였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정부는 다시 한번 ‘비메모리 반도체 강국’을 외치고 있습니다. 최근 뉴스에서는 한국의 비메모리 세계 점유율이 3%에 불과하고, ‘특허 및 디자인하우스 강화’가 여전히 숙제라는 기사를 접합니다.
그 모습에 가슴이 아픕니다.비메모리 설계 인생 26년의 시작이었던 에이디칩스에서 제가 겪었던 좌절과 아픔을 외면한 채, 이제 와서 새로운 구호만 외치는 모습이 공허합니다.
특히, 그 시련을 겪고도 살아남았던 에이디칩스가 결국 최근 상장폐지 절차를 밟게 되었다는 소식은 저의 분노와 슬픔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과거의 무지했던 판단이 결국 한 기업의 마지막 숨통을 끊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반도체 강국이 되려면, 막대한 예산 투입 이전에 과거의 실패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기술자들의 땀과 눈물로 이룩한 혁신을 지키지 못했던 역사를 인정하고, 이제는 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부디 20년 전 우리에게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